갑자기 사람들이 반지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패턴이다. 2020년 영하 20도의 이주노동자 비닐천막 숙소, 그곳에서 사람이 죽자 모두 비닐천막의 전문가가 돼 입을 모았다.

반지하에 산 지 25년. 그 사이 집주인이 세 번 바뀌었고, 어쩌다 보니 이 다세대주택의 지박령이 됐다. 이렇게 오래 머물게 된 건 좀체로 밀린 월세를 독촉하지 않는 집주인 덕이 크지만, 이 지역이 비교적 지대가 높아 침수 위험이 적은 탓도 있다. 침수 걱정에 폭우 쏟아지는 검은 밤을 서성인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115년 만의 홍수, 머리가 쭈뼛거리는 비상사태였다.

침수로 반지하에서 4명이 사망했다. 남 일이 아닌 것 같아 잔뜩 신산한데, 갑자기 사람들이 반지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모두 없애야 한다’, ‘세계 유일의 비참한 장소다’. 아련한 추억, 동정과 연민, 반지하에 대한 날선 비난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어리둥절.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반지하 전문가였구나, 그렇게들 반지하에 관심이 많았구나. 25년을 이곳에서 살았지만, 이렇게 반지하 이야기가 쏟아지는 걸 처음 목도했다. 115년 만의 홍수처럼 낯설고 생경했다. 졸지에 난 못 살 곳에 사는 사람이 됐고, 결국 오세훈 서울시장은 반지하 일몰제를 선언했다.

반지하를 없앤다니 더럭 걱정이 생겼다. 궁핍한 처지에 선택지가 거의 없다. 옥탑방으로 가라는 걸까? 고시원? 깡통 주택? 나 같은 도시빈민들이 들어갈 만한 공공주택이 턱없이 없는데 어디로 사라지라는 걸까. 작년 8월 서대문 한 옥탑방에서도 30대 중증장애인이 폭염으로 고독사했다. 갈수록 폭염의 강도는 세질 텐데, 옥탑방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면 그때는 또 모든 옥탑방을 없애자고 할 건가. 도대체 나더러 어디로 가라는 걸까.

▲폭우가 쏟아지면서 지난 서울 신림동 한 주택 반지하에 살고 있던 40대 여성 A씨와 B씨, B씨의 10대 딸이 숨진 채 발견됐다. 사진은 현장 신림동 반지하 주택 모습. 2022.08.09 ⓒ민중의소리
▲폭우가 쏟아지면서 지난 서울 신림동 한 주택 반지하에 살고 있던 40대 여성 A씨와 B씨, B씨의 10대 딸이 숨진 채 발견됐다. 사진은 현장 신림동 반지하 주택 모습. 2022.08.09 ⓒ민중의소리

주거 문제를 ‘사람’이 아니라 ‘공간’으로 협소화

익숙한 패턴이다. 2020년 영하 20도의 이주노동자 비닐천막 숙소, 그곳에서 사람이 죽자 모두 비닐천막의 전문가가 돼 입을 모았다. 비닐막사를 없애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들의 정의로움과 공분만 잔뜩 토해놓고 우르르 사라졌다. 비닐막사는 여전하다. 이번 홍수 산사태로 부실한 컨테이너 막사에서 한 이주노동자가 사망했다. 사실 이주노동자의 노동권과 지독한 차별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지만, 천막에서의 죽음은 비상하게 주목을 끈다. 죄의식을 덜어내는 속편한 방법인 까닭이다. 특정 공간에 책임을 물고 사태의 맥락을 국소화하는 이른바 연민의 정치, 나의 조막만한 정의로움과 정치적 올바름을 충족시키는데 특정 공간을 비극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게 심간이 편한 것이다.

이런 자기애적 원근법은 주거 문제를 ‘사람’이 아니라 ‘공간’으로 협소화한다. 비참한 장소를 눈 앞에서 치우면 불평등 문제가 모두 사라질 것처럼, 그렇게 사람을 주변으로 내몰고 불평등의 실재를 지운다. 이미 오세훈 시장은 2010년 반지하 일몰제를 선언한 바 있다. 그때도, 지금도 그저 가난과 반지하에 책임을 떠넘길 뿐이다.

반지하가 있는 곳은 한국밖에 없다는 말도 틀렸다. 2021년 허리케인 아이다가 미국 뉴욕을 침수시켰을 때 13명이 지하에서 사망했다. 저지대 퀸즈의 지하층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했다. 희생자는 아시안계 이주민이 대부분이었다. 뉴욕에는 폭우에 취약한 18만여개의 주거용 건물이 있고, 이는 전체 주거용 건물의 25%를 차지한다. 대부분 지하층 주거지가 있는데 도로보다 낮은 주거지는 대략 12만 3천여개. 그곳에 유색인종, 이주민, 노동계급이 살아간다.

아이다 사태 이후, 한국에서처럼 지하 주거지가 화두가 됐다. 주거 정책과 보조금이 다급하게 편성됐고, 지하층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정부 보조금이 슬그머니 줄어들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가 뉴욕을 덮쳤을 때는 수십 만 가구가 침수됐다. 퀸즈와 뉴저지 등 저소득층 지역은 전력이 끊기고 난방과 식수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 심지어 방위군은 부유층 지역으로 먼저 달려갔고, 적십자는 비상 구호품만 달랑 보냈으며, 연방 재난기구는 더디고 느렸다. 보다 못한 청년들이 ‘샌디를 점령하라’는 구호 하에 결집했다. 방치된 이재민들에게 식량과 약품을 전달하고, 주민들에게 정보를 나눠주며, 물걸레를 들고 침수 지역을 청소했다. 바로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의 그 청년들이었다. 재난이 드러낸 불평등 앞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공적 시스템을 상호부조로 대신한 거였다.

결정적 장면 지운 채…문제는 반지하가 아니라 불평등이다

▲뉴욕타임스의 ‘샌디를 점령하라’ 소개 기사
▲뉴욕타임스의 ‘샌디를 점령하라’ 소개 기사

그래도 뉴욕시가 서울시와 다른 게 있다면, 시의회와 시장들이 연이은 홍수 재난을 ‘기후위기 재난’으로 공식화하고 심화될 재난 불평등을 어떻게 타개할지 고민한다는 점이다. 덤으로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해 부자 증세로 기후재난의 불평등 간극을 메꾸려는 연방정부 차원의 노력도 존재한다. 반면, 오세훈 시장은 이번 서울 침수에 대해 일절 기후위기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기후변화를 이야기할 때는 폐페트병 옷을 입고 패션쇼 워킹을 할 때뿐이었다. 하기는 대관람차 같은 치적용 토목 사업에 목을 메는 처지에 기후위기와 불평등 문제가 눈에 들어올 리 있겠나.

이번 재난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다. 절대적으로 인재다. 불평등을 가속화하며 이윤 축적의 폐달을 미친 듯이 밟으며 탄소를 배출해온 자본주의가 이 재난의 가해자다. 탄소 배출의 50% 책임을 갖고 있는 상위 부자 10%가 저 높고 안전한 고층 아파트에서 창밖을 바라볼 때, 탄소 배출 기여도가 미미한 빈자들은 반지하와 시장통의 물 속에서 필사적으로 허우적대는 끔찍한 불평등과 배덕의 풍경. 이 결정적 장면을 지운 채, 그저 반지하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착한 얼굴의 사람들이 그래서 더 얄밉다. 문제는 반지하가 아니라 불평등이다. 가장 먼저 지목되어야 할 대상은 불평등 체계의 주범들이었다.

저기 미 서부의 말라붙은 호수 바닥에서 발견되는 시신들처럼 기후위기는 불평등의 그 부패한 실재를 가차없이 현시한다. 69도까지 지붕 온도가 치솟는 이번 여름의 쪽방촌, 홈리스들, 뜨거운 옥탑과 침수되는 반지하, 위태로운 사각지대의 이주노동자 거주지, 온열질환을 감수하며 노동하는 농민과 노동자들. 뜬눈으로 침수 걱정에 배회하던 그 검은 밤, 25년차 내 반지하집 창가 너머로 남실댄 것은 홍수가 아니라 불평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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