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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실론’(Epsiloon)이라는 과학 전문 잡지가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과학 전문 잡지, ‘시앙스에비(Science & Vie)’ 출신 기자들에 의해 창간된 이 매체는 등장 전부터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사실 과학 저널리스트로서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를 겸비한 이들이 앱실론을 창간하게 된 데에는 씁쓸한 배경이 존재한다. 

‘시앙스에비’는 대단한 명성을 지닌 매체다. 일반 대중을 위한 잡지, 시앙스에비뿐 아니라 청소년을 위한 시앙스에비 주니어를 발행하는 등 과학정보의 대중화에 기여하면서 이 매체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러나 2021년 3월, 프랑스 최대의 잡지 그룹인 리월드미디어가 이 매체의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전체 기자들의 90%를 해고하고 만다. 

싼값에 대체 가능한 뉴스 콘텐츠 생산 구조를 도입하고, 정부의 언론 지원 혜택을 받아 수익을 챙기는 게 목적이었던 이 그룹에게는 굳이 과학 전문 기자들에게 비싼 임금을 지불하면서 퀄리티 콘텐츠를 제작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 해고된 기자들이 ‘저널리스트 없는 저널리즘’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매체가 앱실론이다. 

누군가는 이들의 모험을 ‘미친 도박’이라고 표현했다. 2021년에 종이잡지를 런칭하다니...뻔한 결말이 예상됐다. 그러나 12명의 저널리스트로 구성된 이 소규모 팀은 주저하지 않았다. 지난해 5월, 이들은 새로운 매체를 창간하기 위해 사전 구독자 캠페인에 돌입했는데, 결과는 놀라웠다. 이들의 목표는 한 달 동안의 캠페인을 통해 연 5000명의 구독자를 달성하는 것이었는데, 24시간도 채 되지 않아 사전 구독 신청이 1만3000건 이상을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크라우드펀딩 캠페인을 통해 이들이 모은 구독자는 총 2만4236명이었다. 

약 100페이지 분량(4.9유로, 약 6600원)의 앱실론 1호는 이 과정을 거쳐 지난해 6월 말 첫선을 보였다. 그에 앞서 열정적이며 풍부한 경험을 가진, 그리고 서로를 신뢰하는 전문 저널리스트들로 구성된 앱실론 편집국은 대중에게 입체적이고 심층적인 과학정보를 제공할 것과 작업 방식의 투명성을 준수할 것을 약속했다.

몇몇 전문가들은 이 새로운 매체가 과학 저널리즘의 판도를 바꿀 것이라 예측했다. 그리고 이 예측은 적중했다. 창간 1년 만에 앱실론은 언론과 과학계, 그리고 대중이 주목하는 과학 저널리즘 영역의 레퍼런스로 등극한 것이다. 2022년 6월 기준 이 매체의 구독자 수는 사전구독자 포함, 총 6만4000여명 가량이다. 1년 동안 굵직굵직한 저널리즘 어워즈도 싹쓸이했다. 

앱실론의 성공 비결은 단지 매체의 등장 배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 매체만이 제공할 수 있는 독보적인 콘텐츠에 비결이 있다. 매 호 전 세계 100여 명의 과학자와 인터뷰를 통해 기사를 제작하고 있는데, 이 방식이 앱실론으로 하여금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나아가 독창적인 정보를 보장하고 있다. 

‘터무니없고, 놀랍고, 이해할 수 없는 현실’과 현미경으로 씨름하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 또한 사람들이 이전에 들어본 적 없는 정보, 통념에서 벗어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기존의 사고를 뒤흔들겠다는 것이 앱실론의 야망이다. 복잡한 과학적 사실을 한눈에 이해하게 만드는 선명하고 세련된 그래픽 역시 이 매체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광고는 배제한다. 

“매혹적이면서 동시에 혼란스럽다.” 이 잡지에 대한 한 구독자의 한 줄 평이다. 앱실론의 모험이 언제까지 지속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매체가 ‘저널리스트 없는 저널리즘’에 대항한 멋진 사례로 기억될 것이라는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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