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힘찬 PD 사망사건 노사공동조사위, 현장 개선 방안 합의
사측, 유족에 공식 사과…고인 추모와 재발 방지 제도 개선 약속

SBS 드라마 ‘소방서 옆 경찰서’ 제작 총괄로 일하다가 지난 1월30일 숨진 고 이힘찬 PD(프로듀서)의 사망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노사공동조사위원회 조사가 마무리됐다.

공동조사위는 고인 사망이 업무상 스트레스에 의한 것임을 명확히했다. 제작사 스튜디오S 사측은 유가족에게 공식 사과하고 고인 추모와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을 약속했다. 

유족과 전국언론노동조합 및 언론노조 SBS본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민주노총법률원 등으로 구성된 ‘스튜디오S 고 이힘찬 PD 사망사건 대책위원회’(대책위)는 지난 8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노사공동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고 이힘찬 PD가 사망한 지 9개월, 노사공동 조사에 착수한 지 7개월여 만이다. 

▲ 기자간담회 현장.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제공.
▲ 기자간담회 현장.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제공.

고 이힘찬 PD는 2012년 SBS에 입사해 드라마본부 분사 후 2020년부터는 스튜디오S 소속으로 일했다. 사망 당시까지 SBS 드라마 ‘소방서 옆 경찰서’ 제작 총괄을 맡았고, 촬영 20여일만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대책위에 따르면, 고인이 생을 마감하기 전날 그가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보낸 SNS 메시지에는 “모든 게 버겁다”고 적혀 있었으며 그 위에는 모두 업무에 관한 기록 문서가 남겨져 있었다. 

‘소방서 옆 경찰서’는 화재와 범죄에 대응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다. 조사위는 “화재, 폭파신이 거의 매회 등장하는 데다가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각종 특수 장비, 특수 효과 사용, CG작업 등에 따라 제작 과정에서의 변수도 그만큼 늘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 소방서 옆 경찰서 공식포스터.
▲ 소방서 옆 경찰서 공식포스터.

고인은 주변 동료 등에게 “내가 촬영이 끝날 때까지 살아있을지 모르겠다”, “뇌가 정지되어 있는 것 같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는 등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토로하며 자책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료들도 조사위에 촬영이 시작되면서부터 고인이 무표정에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고 정신적으로 힘들다는 이야기도 했으며 자책과 급격한 상실감에 빠지는 모습을 보였다고 진술했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고인의 동생 이희씨는 “조사 기간 동안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빨리 흐른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초 단위로 늘어진 것 같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며 “이 보고서는 연대해 주신 모든 분들의 시간과 땀이 담겼고, 혼자 떠나간 형의 쓸쓸함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보고서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읽어 세상에 알려졌으면 한다”고 했다. 

▲ 유족 대표 이희씨.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제공.
▲ 유족 대표 이희씨.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제공.

촉박한 일정·돌발변수 대응 등 업무상 스트레스가 사망 원인

고인 사망 후 2월18일 유족과 대책위는 SBS, 스튜디오S 등 양사가 모두 참여하는 노사공동진상조사와 재발방지 대책 수립을 요구했다. 하지만 SBS 사측은 스튜디오S와 별도 조직이라는 점과 관여할 법적 권한이 없음을 이유로, 스튜디오S 사측은 자체 조사를 유가족과 상의해서 진행하겠다는 이유로 공동 조사 참여를 거부했다. 대책위는 양사에 공동조사 구성과 참여를 재차 촉구했고, 3월28일 스튜디오S가 참여한 공동조사위 첫 회의를 개최했다. SBS는 조사위원회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재차 밝혔다. 대책위는 조사 활동에 필요한 경우 SBS측에도 협조와 지원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했다. 

유가족 대표, 노조, 사측이 참여한 공동조사위는 지난 4월부터 6월 초까지 30여 명의 동료와 드라마업계 관계자들에 대한 면접조사를 실시했다. 공동조사위는 면접 조사와 고인이 남긴 업무용 노트북, 스튜디오S 측에서 제공한 회사 운영 현황에 대한 설명자료 등을 토대로 한국 드라마산업의 구조적 문제와 드라마 PD의 직무 스트레스 요인, 고인이 사망에 이르게 된 원인, 비극의 재발 방지를 위한 개선 대책을 합의해 보고서에 담았다. 

▲ 김영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센터장. 사진=윤유경 기자.
▲ 김영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센터장. 사진=윤유경 기자.

조사 결과 공동조사위는 “평소 업무에 대한 애정과 책임이 컸던 고인이 부족한 예산 범위 내에서 작품을 무사히 완수해야 한다는 압박, 촉박한 편성 일정으로 인한 불안, 화재 및 사고 장면 촬영이 야기한 돌발 변수 대응 등으로 업무상 스트레스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증폭됐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인의 사망이 업무상 스트레스에 의한 것임을 명확히한 것이다. 

공동조사위는 “본격적 촬영 돌입 이후 거의 매일 예측 불가능한 상황들이 더해져 더 이상 PD 개인이 감내하기 어려운 극단적 상황에 내몰렸으나 회사 차원의 고충처리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했다. 행정 업무, 대본 분석, 일정 관리부터 본래 조연출이 담당하던 현장 비용 처리 업무까지 모두 맡게 되어 과중한 책임과 업무량에 노출되고 예측 불가능성에 따른 불안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PD 업무에 대한 고충도 함께 지적했다. 

보고서에는 드라마 제작진들이 현장에서 겪고 있는 고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고인의 동료들도 부족한 예산, 납기(편성) 압박, 인력 부족, 고충처리 시스템 등을 지적하며 업무 수행 과정상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한 스튜디오S 구성원은 “사실상 주 100시간 이상도 일하게 된다. 시도 때도 없이 연락 오고 촬영 없는 날도 미술이나 세팅, 편집 등 업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근로시간을 카운팅하는 것이 별 의미 없을 정도다. 조연출의 경우 촬영이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쉬는 날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드라마산업에 내재한 구조적 문제 드러나

공동조사위는 “방송사들의 드라마 제작 자회사 설립 확산, 노동시간 제도 변화, 코로나 팬데믹에 따른 드라마 소비 증가와 관련 산업의 폭발적 성장, OTT 플랫폼 영향력 증가 등 최근 급변한 드라마산업에 내재한 구조적 문제들이 ‘소옆경’에 응축됐다”고 지적했다. 

최근 드라마 제작 환경이 급변했지만 그에 적합한 내부 시스템은 전혀 갖춰지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는 “제작사, 방송사 인사들의 공통 증언은 시장이 급변하는 과정에서 기존 기준들은 다 무너졌다는 것”이라며 “특히 단가라든가, 시장에서 거래 협상 기준이 되는 것들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됐다”고 했다.  

▲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 사진=윤유경 기자.
▲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 사진=윤유경 기자.

단기간에 드라마 한 작품을 기준으로 제작 인원이 투입돼 고용 자체가 불안정하며 장기간 노동이 관행처럼 굳어진 한국 드라마 산업의 구조적 문제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김 노무사는 “드라마 제작 현장의 장시간 노동 문제뿐 아니라 드라마 상품을 만들기 위해 방송사라는 사용자가 행해왔던 여러 관행, ‘이 바닥은 원래 그래’라는 말로 당연시됐던 제작 시스템 등에 비춰보면, (드라마 제작에 있어) 정해져 있는 틀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했다”며 “다 같이 힘드니까 나만 힘들다고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 아무리 힘들어도 개개인이 알아서 버티라는 식의 조직 문화를 강요하는 분위기도 문제”라고 비판했다. 

제작 기간 확보, 긴급휴가제 도입 등 재발방지 방안 마련해

유족, 노조, 사측은 진상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 방안을 도출했다. 시급한 과제로 ‘적정 제작 기간 확보’를 꼽았다. 연출자와 프로듀서의 의견을 반영해 첫 방영일로부터 최소 6개월 이상 12개월 범위 안에서 사전 제작기간을 설정해 편성(납비) 압박을 완화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월 1회 ‘심리상담의 날’을 지정하고 긴급휴가제(번아웃 예방 휴가제)를 도입하는 등 프로그램 제작 투입 시 회사 차원의 직무 스트레스 관리 시스템을 도입해 운영하기로 했다. 

아울러 제작 기간 중에라도 필수 휴일을 보장하고 휴식일과 업무 종료 후에는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해 ‘상시 대기’ 체계를 해소하도록 했다. 현장에서 많은 혼선을 일으키는 노동시간 공통 운영 지침(52시간 지침)과 현장 안전관리 지침을 수립해 시행하기로 했다. 위 내용들을 포함한 개선 방안은 노사가 ‘스튜디오S 드라마 제작준칙’으로 제정할 예정이다. 

정형택 언론노조 SBS본부장은 “어떻게 하면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의 편성·예산 압박이 ‘현장의 권한’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 몰리는 걸 막을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췄다”며 “노사 간의 협약 형태로 만들어 단순히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효성과 강제력 있게 지켜질 수 있도록 노조가 지속적으로 감시·견제하겠다”고 했다. 

▲ 정형택 언론노조 SBS본부 본부장. 사진=윤유경 기자.
▲ 정형택 언론노조 SBS본부 본부장. 사진=윤유경 기자.

한편, 7일 오후 유족과 스튜디오S 사측의 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간담회에는 고인의 아버지, 어머니, 동생, 대책위 그리고 사측을 대표해서는 한정환 스튜디오S 대표와 김동호 경영국장 등이 참석했다. 

한 대표는 이 자리에서 “공동 조사를 통해 회사 제작 시스템을 성찰하고 고 이힘찬 PD가 겪었을 고통을 엄중하고 무겁게 받아들였다”면서 “유가족분들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했다. 그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약속드린 개선책을 충실히 이행하고 고인의 명예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오는 12일 예정된 ‘소방서 옆 경찰서’ 첫회 방송에는 고인에 대한 추모 메시지가 전파를 탄다. 최종화 마지막 장면에는 고인의 사진과 추모의 뜻을 담는다. 회사 차원에서 매년 고인에 대한 추모 의식도 진행하기로 했다. 언론노조 SBS본부는 고인의 기일을 ‘조합원 안전의 날’로 지정해 일터 안전과 조합원 건강을 위한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고 이힘찬대책위는 공동조사 보고서 발표 후에도 이행 감시를 위한 활동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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