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의 시선]

▲MBC 뉴스특보를 진행중인 이선영 아나운서. ⓒMBC 보도화면 갈무리
▲MBC 뉴스특보를 진행중인 이선영 아나운서. ⓒMBC 보도화면 갈무리

‘역대급 위력의 제 11호 태풍 힌남노가..’ 기자가 쓴 앵커멘트를 지웠다, 다시 써 넣었다 했다. ‘역대급’은 ‘대대로 이어 내려온 여러 대. 또는 그동안’이라는 의미의 ‘역대’와 계급이나 등급 따위를 이르는 ‘급’의 합성어인데 표준어처럼 자주 쓰이고 있지만 사실은 2010년쯤 인터넷 문화권에서 생긴 신조어다. 사전적으로만 따지고 보면 ‘대대로 이어 내려온 등급’이라는 의미로, ‘사상 최대(고)’라는 뜻으로 쓰이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런데도 지난 집중호우 때와 폭풍 ‘힌남노’ 특보 때 여지없이 가장 빈번히 쓰였다. 전 세계적인 에너지 위기와, 유례없는 금리 인상 기조에 대한 리포트에도 매 번 등장한다.

시청자에게 최선의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전국구 방송에서 표준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순리. 결국 ‘위력적인 태풍 힌남노가..’로 앵커멘트를 고쳐 방송을 했다. 모니터링을 하는데, ‘역대급’이 대다수에게 통용되는 바로 그 느낌, 위력적인 태풍 중에도 가장 강력하다는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건 아닌지 후회스러웠다. ‘역대 최대급’으로 고칠 걸 그랬나, 그런 표현은 시청자들이 어색하게 느끼지 않을까. 여러 고민이 스쳐갔다. 표준어를 쓰기 위해서 단어가 주는 미묘한 의미 차이를 포기한 건데, 그렇다면 ‘잘 전달한 것’일까. 

얼마 전 ‘심심한’ 논란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한 웹툰 작가의 사인회가 지연되자,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는 표현과 함께 공지사항을 띄웠는데 일부 시민들이 ‘심심(甚深)한’을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의미의 동음이의어 ‘심심한’으로 오해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주로 인터넷을 많이 사용하는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이런 오해가 발생했는데, 이를 두고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우려부터, 우리나라의 실질 문맹률(글자를 소리로 읽을 줄은 알지만,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이 75%에 육박했다는 근거 없는 주장까지 나왔다. 

처음에는 이전에 비해 한자어가 잘 쓰이지 않는 환경, 이를테면 영어권 문화의 보편화 및 극히 요약된 정보를 영상으로 습득하며 빠른 속도로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세대적 특징에 초점이 맞춰지며, 젊은 세대들을 대상으로 한자 교육을 다시 시행해야 한다는 등의 논의가 나왔다. 그러다 곧, 이러한 시각은 변화한 언어 환경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번 논란의 핵심은 ‘문해력 저하’가 아닌, ‘언어 교체’에 있다는 분석이 등장했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불과 30년 전 소설인 박경리, 이문열 작가의 문장 속에서도 지금은 어색한 표현이 발견된다”며, “언어 교체가 빠르게 이뤄지는 가운데 심심한 사과는 사소한 논란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천 교수의 말처럼 세상이 빠르게 움직이는 만큼 언어는 그 속도를 반영해 시시각각 변하며 사람들에게 흡수되는데, 표준어와 비표준어에 대한 판단은 그만큼 기민할 수 없다. ‘역대급’이 언젠가 표준어로 인정돼 고민 없이 앵커멘트와 자막에 쓸 수 있을 때 어쩌면 ‘역대급’ 대신 다른 표현이 널리 쓰이고 있을는지 모를 일이다. 

역대급으로 ‘역대급’이라는 표현을 많이 써 온 지난 한 달여와, ‘심심한’이 불러온 이른바 문해력 논란을 돌아본다. 정의상 표준어의 개념에 어긋나지만 대다수가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말과, 표준어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말. 어떤 말을 써야 할지에 대한 답은 ‘교양’을 강조한 표준어의 정의에 있다.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로 풀이 되는 ‘교양’이란, 내 입장에서 나아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전에 등재돼 표준어라는 지위가 있다고 해도 나와 다른 세대, 다른 입장의 사람을 고려하지 못한 언어라면 표준어로의 생명력을 잃은 것이다.
 
표준어 사전에 등재된 말이라면 무조건 옳다는 규범적 틀이 해체되고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며 스스로 창조하는 우리말의 특성을 유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아나운서니까, 바른 우리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무겁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표준어라면 무조건 괜찮다는 태도는 무책임하다. 나아가 내가 쓰는 언어가 누구에게 닿아 어떤 상황에 쓰이는지 세심한 고민이 필요하다. 웹툰 소비층이 여러 세대에 걸쳐있다는 것을 조금만 더 들여다봤다면, ‘심심한 사과’보다는 ‘마음 깊은 사과’가 좋았다. 뉴스에서도, 필요하다면 ‘역대급’도 괜찮지 않을까. 국어사전이 아니라 여러분이 결정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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