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이 대한민국이다! ⑥]

10월29일은 지방자치의 날입니다.

지방자치의 정착이라는 공보처의 설립 취지를 통해 탄생했기에 지역민방이 느끼는 지방자치는 남다르다고 합니다.

수도권 초집중과 지방소멸의 위기, 강한 구심력에 비해 약한 원심력. 어디서부터 해법을 찾고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을까요?

지역방송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지역민방 9개사는 10월24일부터 30일까지 한주를 지방자치 주간으로 정하고 기획보도, 특집 대담, 캠페인 등의 제작 편성을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더불어 본지에는 릴레이 기고를 희망해왔습니다.

미디어오늘은 기획 연재 '지역이 대한민국이다' 시리즈를 통해 지역의 생생한 목소리를 독자 여러분께 전합니다. - 편집자 주

 

저녁 7시, 조금은 늦은 퇴근을 준비하던 중 회사 대표전화가 울렸다. 공식 업무시간이 지난 터라 전화를 받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혹시나 중요한 제보 전화일까 싶어 수화기를 들었다.

“거기 방송국입니까?” / “네. G1방송입니다. 말씀하세요”
“지금 가수들 노래하고 있는 데가 어딥니까?” / “네?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테레비(텔레비전)에서 진성이(가수 진성)가 노래를 하고 있는데?”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칠순은 훌쩍 넘었으리라 짐작되는 어르신의 말씀에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전국 9개 지역민영방송이 공동제작하고 있는 성인 가요프로그램 ‘전국TOP10가요쇼’에 대한 문의라는 걸 알아챘다.

“아, 아마 선생님께서는 ‘전국TOP10가요쇼’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재방송이 나가는 것 같은데, 어쨌든 공연을 지금 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아니 지금 노래하는 걸 내가 보고 있는데… 테레비 켜 봐요. 지금 한다니까?”

단순한 문의라고 생각했던 통화는 10분을 넘고 있었다. 방송의 제작과 편성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어르신을 위해, 녹화와 편집, 본방송, 재방송 개념까지를 일일이 설명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나의 당황스러움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녹화 현장에 꼭 가봐야겠다며 녹화 날짜와 장소를 묻는 어르신께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제작진에게 확인해 꼭 다시 연락드리겠노라 약속한 후에야 통화를 마칠 수 있었다.

▲ ‘전국TOP10가요쇼’는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 전국 9개 지역민영방송을 통해 방송된다. 사진=전국TOP10가요쇼 갈무리
▲ ‘전국TOP10가요쇼’는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 전국 9개 지역민영방송을 통해 방송된다. 사진=전국TOP10가요쇼 갈무리

지역방송에서 일한 지 17년 차.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 프로그램의 기획을 함께했던 제작진의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당장 목전에 닥친 업무와 일상의 고단함을 핑계로 전국TOP10가요쇼를 ‘본방사수’한 기억도 손에 꼽을 정도다. 우리 방송을 이토록 원하고 궁금해하는 시청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사에서 정책과 홍보 업무를 담당하는 나조차 공개녹화 프로그램의 제작 일정에 대해 그리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졌다.

수십 년간 지상파TV가 누려 왔던 지배적 사업자로서의 지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하물며 지역방송 프로그램은 그 존재 이유를 의심받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지역방송은 이제 찾는 사람이 없다’, ‘지역방송의 콘텐츠 경쟁력은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다’와 같은 자조 섞인 클리셰 아래, 각종 제작비와 출연료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상황에서, ‘앞으로 지역방송은 대체 어떤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누구도 뾰족한 답을 내놓을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지역방송이 처한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명명백백한 사실은, 여전히 지역방송의 역할을 기대하는 시청자들이 존재하며, 지역방송사는 그들을 위해 양질의 방송 콘텐츠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송 콘텐츠는 예술 작품과는 다르다. 작가적인 상상력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예술의 지향과도 맞닿아 있지만, 그 과정에 투입되는 자본과 인력의 규모가 결과물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이 방송 콘텐츠를 예술이 아닌 산업으로 분류하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방송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지역방송의 입지는 해마다 줄어 들었고, 광고 매출은 10여 년 전에 비해 반토막이 되어버렸으며, 이러한 어려움은 끝 모를 현재진행형이다.

모든 지역방송이 제작비 마련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이때, 국회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방송통신발전기금으로 운영되는 내년도 지역·중소방송 프로그램 제작지원 예산이 올해(39억 원)보다 15억 원이 증액된 규모로 상임위 심사를 통과했다고 한다. 아직 예결위 심사와 본회의 심의를 넘어야 하지만, 제작비 가뭄에 목말랐던 지역방송사 입장에서는 단비와 같은 희망이 아닐 수 없다.

10여 년 전, 지역방송 막내 PD로 6미리 캠코더를 들고 시골 마을로 다니며 지역 전통음식을 촬영하던 때였다. 강원도 토속 막장을 담그는 할머니와 몇 시간에 걸친 촬영을 하다 보니 밥때를 한참 넘긴 시간이 되고 말았다. 할머니는 없는 찬에라도 한 술 뜨고 가라고 붙드셨지만, 충분한 사례금을 드리지도 못하는데 공짜밥까지 얻어먹을 면목이 없었다. 여러 번 정중히 사양하고 차에 오르던 찰나, 이거라도 가져가라며 차장 너머로 던지듯 건네 주신 꾸러미. 입 안이 헛헛할 때마다 요긴하게 쓰려고 아껴두셨을 커피맛 사탕 한 봉지였다. 방송국으로 돌아오며 입에 물었던 그 사탕의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건, 사탕 자체의 달콤함이 아니라 그 속에 녹아 있던 할머니의 소박하지만 따뜻한 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의 기억은 내가 지역방송에서 일하며 지치고 좌절할 때마다 나를 붙들어 주는 힘으로 오롯이 남아 있다.

▲ ‘전국TOP10가요쇼’는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 전국 9개 지역민영방송을 통해 방송된다. 사진=전국TOP10가요쇼 갈무리
▲ ‘전국TOP10가요쇼’는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 전국 9개 지역민영방송을 통해 방송된다. 사진=전국TOP10가요쇼 갈무리

수십 개에 달하는 지역방송사가 한 해에 투입하는 제작비에 비하면 정부의 제작지원 사업예산은 여전히 충분치 않다. 그러나 작은 사탕 하나가 지역방송 막내 PD를 중견 PD로 성장시킨 자양분이 되었던 것처럼, 정부와 국회의 적극적인 관심이 지역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명품 콘텐츠 탄생의 밑거름으로 작용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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