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사회운동을 다룬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영화 <영웅>이 상영중이다. 서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공고한 성차별, 나이차별, 외모차별 등이 어떠한 문제인식도 없이 다뤄지는 것이 불편했지만 사회운동가로서 부당한 억압을 끝내기 위해 싸웠던 삶은 숭고했다. 이 영화가 끝나자 뒷좌석의 한 어르신이 이런 말을 했다.

“저런 분들이 있었으니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 수 있는 거야”

독립운동가 조마리아와 그의 아들 안중근을 비롯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살기를 바라며 일제에 맞서 힘겨운 운동을 이어 나갔던,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렸다.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인간답게 살기위해 많은 것을 감수하며 권력에 맞서는 사회운동가들을 생각했다.

▲ 영화 ‘영웅’ 포스터.
▲ 영화 ‘영웅’ 포스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저항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저항에는 감동하면서도 자본주의, 비장애인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에 저항하는 사회운동가들의 저항에는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감하지 못하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자본가와 국가가 만들고 유지하는 제도와 문화 그리고 언론과 미디어 등을 통해 우리는 오히려 기득권자들에게 공감하도록 만들어진다. 억압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사회부적응자, 낙오자 심지어는 북에서 지령을 받았다거나 테러리스트로 여겨지기도 한다.

특수고용직으로 노동자의 권리보장 사각지대에 있으면서 최저임금에 해당하는 안전운임제를 요구했던 화물운송노동자,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시설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삶 대신 다른 선택지를 달라고 적극 요구한 장애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폭력이 일상이 돼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평등하고 안전한 사회를 요구하는 여성 등 사회적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살고자 권력에 맞서고 있는 사회운동가들과 그들을 대하는 국가의 태도가 떠올랐다.

안타깝게도 이 국가는 헌법에서 보장된 노동자의 단결권 행사의 이유를 살피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노동조합이 다시는 권리 주장을 하지 못하게 하겠다며 대화를 거부했다. 정부는 협상과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업무개시 명령을 하며 복귀하지 않으면 벌금이나 화물운송 자격취소 등 행정처분 하겠다고 윽박질렀다. 생존을 위해 저항하는 노동자를 국가는 적으로 간주했다. 장애인도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이동권, 교육권, 탈시설 등을 요구한 오랜 싸움의 결과가 예산에서 반영되지 않는 까닭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다시 지하철을 탔다. 모든 국민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이 국가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신의 불법적 행위는 외면한 채, 권리의 주체로서 행동하는 휠체어 이용인들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불사했다. 성차별과 성폭력 없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달라는 지극히 당연한 요구를 외면하며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가족부 해체를 선언하고 교과서에서는 성평등을 지웠다. 안중근 의사의 서거 103년을 앞두고 있지만, 이 땅에서는 여전히 권력은 인간답게, 평화롭게 살고싶다고 요구하며 저항하는 이들을 철저하게 억압하고 응징한다. 시민들을 저항을 하지 않는, 못하는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 국가의 목표로 보일 정도다.

▲ 1월5일 오전 서울 4호선 혜화역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지하철 선전전을 이어가고 있다. ⓒ 연합뉴스
▲ 1월5일 오전 서울 4호선 혜화역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지하철 선전전을 이어가고 있다. ⓒ 연합뉴스

저항하는 사람들을 대화의 상대이자 권리의 주체가 아닌 “피해자 다움(불쌍한 약자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버릇없는 시혜의 대상” 정도로 여기는 매우 잘못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일제가 조선인을 평등한 대화의 상대가 생각한 것이 아닌 ‘굴복시켜야 할 비인간(영화 속에서는 ‘개’로 표현되었다) 존재’로 여긴 것과 겹쳐진다.

개인주의가 심화된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는 무관하거나 혹은 방해가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싸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은 구조의 문제라기 보다는 개인의 책임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를 정당한 싸움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나섰던 사회운동가들로 하여금 우리가 현재를 살 수 있는 것처럼, 노동자, 장애인, 여성들의 투쟁은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화물연대의 투쟁은 특수고용직으로 최저임금이라는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에서 조차 벗어난 노동자들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의 권리향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장애인 등이 시설이 아닌 마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요구하는 전장연의 투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시설)에서 삶을 마감하는 사회에서 모든 노인들(즉 우리 모두)의 권리보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사회운동이 성숙되고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투쟁에 나서서 ‘벌금폭탄’을 감당하고 낙인과 편견을 감내해야한 사회운동가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이 사회는 철저하게 권력자의 시선에서 사회운동가를 바라보고 평가하게 한다. 이 국가는 죽지 않고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달라는 헌법에 보장된 최소한의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하고 ‘노동시장의 이중구조화가 차별’, ‘시민들의 출근길을 막는 불법행위’, ‘젠더갈등을 일으키는 페미니즘’이라는 근본적인 착취구조를 숨기는 프레임을 가져와 ‘을들의 전쟁’으로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역할을 사회운동가가 하고 있지만, 소수의 사회운동가가 세상을 바꾸고자 할 때 그들이 감내해야 할 대가는 너무나 크다. 과거 제국주의 통치 시대에는 그 대가가 목숨이었고, 지금은 신자유주의 통치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까닭에 벌금폭탄이 그 대가가 되고 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권력자가 부여하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할 때, 그리고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관점을 가질 수 있을 때, 이를 위한 작은 역할을 할 수 있을 때 세상은 변화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회운동의 성공여부엔 시민들의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중요하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한 명의 자본가나 정치인을 끌어내린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돈 중심의 세상을 끝내고 사람중심 생명중심 돌봄중심의 세상으로 체제를 전환해야 하기에 소수의 사회운동가만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저항하는 것이 필요하다. 저변에서 시민들이 함께 행동해야 하는것이다.

▲ 2022년 12월20일 오전 서울 국회 앞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관계자들이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정부 조치 관련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 한국정부 제소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 2022년 12월20일 오전 서울 국회 앞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관계자들이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정부 조치 관련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 한국정부 제소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억압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응징하는 국가는 정당한가? 저항하는 사람들이 죄인인가? 극중 안중근의 사형선고가 있었던 재판에서는 ‘누가 죄인인가’라는 노래가 울려퍼진다. “무고한 대한의 사람들을 대량 학살한 죄, 조선의 토지와 광산과 산림을 빼앗은 죄, 교과서를 빼앗아 불태우고 교육을 방해한 죄, 신문사를 강제로 철폐하고 언론을 장악한 죄. (중략) 그들의 위선과 우리의 진실을 세계에 알려주시오! 누가 죄인인가? 우리를 벌 할 자 누구인가?”

누가 모두에게 안전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가? 죄인은 부당한 억압에 맞서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당한 억압을 만들고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더 이상 가난한 노동자라는 이유로 일하다 죽지 않을 수 있도록,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도록,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시민의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폭력을 두려워하며 살지 않을 수 있도록, 노동/성평등/민주주의가 지워진 교육이 아니라 자신을 탐구하고 타인과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사회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돕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권력이 길들이는 언론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만드는 언론이 가능하도록 계속해 저항은 이어져야 한다. 슬프게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운동가와 시민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희망적이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사회운동가와 시민들이 있다.

이 기사를 후원합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